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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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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문화유적 설명 목록
환구단(사적157호) 구 러시아 공사관(사적 제253호)
정동교회(사적 제256호) 경희궁지(사적 제271호)
서울성공회성당(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35호) 경교장(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129호)
주변 문화유적 설명

환구단(사적157호)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줄여서 원단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된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 성종 2년(983) 정월에 처음 시행된 원구제는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세조 2년(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원구제는 중단되었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년(1897)에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부터이다.
현재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 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구 러시아 공사관(사적 제253호)

고종 27년(1890)에 지은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이다. 한국전쟁으로 건물이 심하게 파괴되어 탑과
지하 2층만이 남아있었으나, 1973년에 복구되었다. 한쪽에 탑을 세웠으며, 정문은 개선문 양식이다.
일본군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세자와 함께 피신하여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 친일파인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시아적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이 주도하는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고종이 거처했던 방의 내부는 건물과 같은
르네상스풍의 실내장식을 했다.

정동교회(사적 제256호)

고종 광무 2년(1898)에 준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신교 교회건물이다. 본래는 십자형으로
115평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 날개 부분만 늘려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모습에는 손상이 없다.
벽돌쌓기를 하였으며, 곳곳에 아치형의 창문을 내어 고딕양식의 단순화된 교회당 모습을 이루고 있다.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기단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배어있어 주목된다. 이 교회당의 종은
장식없는 내부 기둥들의 겉모습과 함께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기 있다.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북미계통의 단순화된 교회건물이다.

경희궁지(사적 제271호)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서울성공회성당(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35호)

로마네스크 양식의 3층 교회건물이다. 조선 고종 27년(1890)에 우리나라에 온 성공회 1대 주교인 코프의
전도활동으로 성공회의 기초가 잡히게 되자,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가 건립하였다. 영국인 딕슨의 설계로 감독관 브로크가 192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5월에 완공하였다. 十자형의 평면구조를 갖고 있는
이 교회는 기초부와 뒷면의 일부는 화강석을 사용하고 나머지 벽체는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건물 전체에 공간상의 높낮이를 다르게 하여 율동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종탑부는 중앙의 큰 종탑과 그 앞의 작은 종탑이 생동감있게 연결되어 있다. 서울 성공회성당은 일제 침략기에 서양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본격적인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경교장(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129호)

1938년에 지어진 양옥주택으로 안정된 비례와 아치창을 이용한 단아한 외관이 특징이다. 1930년대 성숙된
건축술을 잘 보여주는 이 건물은 광복 후 김구(1876~1949) 선생이 한동안 사용하기도 하였다. 김구 선생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국내ㆍ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광복 후 남북이 하나된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힘썼다. 경교장은 1949년 김구 선생의 저격사건이 벌어진 현장이기도 하다. 내부에 부분적인
변형이 있지만 건물의 모습이나 기본적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