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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 덕수궁 이야기 > 덕수궁 소개  > 덕수궁의 역사  > 연혁
덕수궁의 연혁 목록
창건 대한제국시대, 일제시대의 덕수궁
대한제국기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 일대 모습 일제시대의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일대 모습
광복이후 현재의 덕수궁  
창건

창건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1년 반만에 한양으로 돌아왔으나, 한양의 모든 궁궐은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머물 궁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황화방(皇華坊)에 위치한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집과 인근의 민가 여러 채를 합하여 ‘시어소(時御所)’로 정하여 행궁(行宮)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훗날 덕수궁(경운궁)의 시작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궁궐을 재건하려 했으나, 당시의 궁핍한 국가재정 상황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1608년 2월 정릉동 행궁 정전(석어당 추정)에서 승하하고 만다.

선조의 뒤를 이어 이 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창덕궁을 재건하여, 그해 10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이름을 비로소 짓게된다.
광해군은 곧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와 머물다 1615년 창덕궁으로 아주 이어(移御)를 한다.

한편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로부터 왕으로 인정을 받고, 경운궁 별당(즉조당 추정)에서 즉위한 뒤 인목대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이어하게 된다.
이때 인조는 선조가 머물던 즉조당과 석어당 두 곳만 남기고, 나머지 경운궁의 가옥과 대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경운궁을 아주 떠나게 된다.
이로써 경운궁은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로써 기능을 마감하였다.

이후 영조때(영조 49) '선조가 경운궁(덕수궁)에 거처를 정한 3주갑(180년)과 선조의 기일(승하일)을 맞이해, 영조가 세손(정조)과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는' 등 기념의식을 갖기도 하였고, 고종 30년(1893)에 '선조가 경운궁에 거처를 정한 5주갑(300년)을 맞아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경운궁 즉조당에서 추모 사배례(四拜禮)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난 후 1897년 고종이 다시 이곳으로 환어(還御)하기 전까지 비어있게 된다.

대한제국시대, 일제시대의 덕수궁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난 후 부터이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급히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여 무려 1년이 넘게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물던 고종은 마침내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궁(還宮)하게 된다.

당시 경운궁 주변 정동 일대는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세력들의환 근거지였던 만큼, 이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같은해(1897년) 8월 고종은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반포(頒布)하고, 10월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한 뒤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는다. 이처럼 경운궁의 또 다른 역사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선포와 더불어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작되었다.

경운궁은 고종이 본격적으로 임어하게 되면서 그에 걸맞는 궁궐의 격식을 갖추어 나갔지만, 1904년 4월 함녕전에서 비롯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은 또 한번 큰 시련을 겪는다.
중화전을 비롯한 석어당, 즉조당, 함녕전, 궐내각사(闕內各司) 등 중심부에 있던 건물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고, 경운궁(덕수궁)은 이전의 모습을 크게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재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의 모든 건물들은 이 이후에 재건되었으며, 그 규모도 대폭 축소되고 만다.

그러던 중 1905년 경운궁 중명전에서 소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에 고종은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황제의 특사 자격으로 비밀리에 파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로 인해 1907년 8월 일제는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이 경운궁 돈덕전(惇德殿)에서 황제에 오르게 된다. 황제에 오른 순종은 그 해 11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했으며, 이로써 경운궁도 마침내 궁궐로써 그 기능과 생명을 다하게 된다.

이때 순종은 경운궁에 계신 태황제(太皇帝) 고종에게 '덕수(德壽)'라는 궁호(宮號)를 올리는데, 오늘날 덕수궁(德壽宮)이란 이름은 이렇게 얻게 되었다. 한편 덕수(德壽)란 궁호는 왕위를 물려준 '선왕의 덕과 장수를 기린다'는 뜻으로, 특정 고유명사로서가 아니라 물러난 선왕에게 올리는 궁호의 보통명사격인 셈이다. 1919년 고종이 함녕전에서 갑자기 승하하자, 덕수궁은 주인이 없는 궁궐이 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한다.

대한제국 당시 덕수궁의 전각을 살펴보면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궁궐의 중심부가 밀집된 동남쪽에는 대한문을 비롯 중화전·함녕전·즉조당·석어당·준명당·정관헌 등 당시 정전·편전·침전·궐내각사 등이 있었으며, 궁궐서쪽으로는 미국 영사관과 러시아 공사관 사이에 서양식 2층 건물인 중명전 일대와 환벽정 등이 있어, 접견실·연회장 등으로 주로 쓰였다. 북쪽으로는 선원전(璿源殿)과 혼전(魂殿)이 있어 왕실의 제사가 치러지던 곳으로 지금의 舊경기여고터, 덕수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그밖에 덕수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 구름다리(雲橋)가 각각 설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북쪽의 구름다리는 러시아 공사관 언덕 위에서 경희궁으로 이어져 있었고, 남쪽의 구름다리는 중화전 남쪽 옛 영복당 자리에서 옛 법원자리로 옮겨온 의정부(議政府)와 연결하기 위한 통로였다.
고종이 승하한 뒤 3년만에 일제는 현재의 덕수궁 돌담길을 뚫고 도로의 개설, 학교, 방송국 등을 지어 덕수궁을 절단한다. 이로써 덕수궁의 면적은 더욱 축소되고 그 모습을 잃어간다.

아울러 대부분의 건물을 철거 또는 방매(放賣)하였으며, 훼철된 덕수궁을 1933년 10월 공원(公園)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일제침략기를 거치면서 덕수궁은 대한제국기의 원형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외에 궁성 밖 서쪽 정동 10번지에 1904년(광무 8년) 4월에 경운궁에 불이 났을 때 고종이 피하였던 수옥헌(嗽玉軒)이 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한 장소이고 후에 중명전(重明殿)으로 개칭되었고, 순종의 이어소(移御所)로 사용되다가 구미인(歐美人)의 클럽으로, 개인회사의 사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건물이다.
복원공사를 거쳐 지금은 전시관으로 일반에 개방되고 있다.
중명전과 러시아 영사관 사이에 환벽정이 있었다. 순종이 태어난 건물이 있고 명성황후의 혼전이던 경효전(景孝殿)과 순명효황후의 혼전(魂殿)인 의효전(懿孝殿)도 있었다. 이후 의효전은 창덕궁으로 옮겼다.

일제강점 이후에 궁의 서쪽 선원전(璿源殿)의 터를 일부 통과하는 도로를 열었다. 지금의 미국대사 관저와의 사잇길이 이것이다. 도로 서쪽에 떨어져 나가게 된 순헌황귀비 엄씨(嚴씨)의 혼전(魂殿)을 헐고 그로부터 북쪽으로 전일의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를 지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그 맞은 편, 즉 도로의 동편 제사 준비소 터에다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의 교사를 지었다. 1927년에는 그 동쪽 언덕 위를 밀어내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의 청사를 지었다.

순헌황귀비 엄씨(嚴씨)의 혼전 부근에는 그가 소유하던 과수원이 있고 제사의 준비소에는 희생(犧牲)의 도살장 제수용구(祭需用具)를 두는 건물들이 있었고 방송국의 동남방에는 귀족들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던 수학원의 목조건물이 있었는데 정동 3번지로 지금의 성공회 교회당이 있는 일대가 그 터전이다.

그러나 1907년(광무)의 고종 폐위(廢位) 및 1910년(융희) 한일강제병합으로 국세가 크게 기울어짐과 함께 궁궐 안의 많은 전각 문루 등이 차례로 헐리어 1935년경에 와서는 대한문(大漢門), 건극문(建極門), 포덕문(布德門), 생양문(生陽門), 용강문(用康門) 등의 궁장(宮墻) 문 안으로 중화전, 함녕전, 덕홍전, 석어당, 즉조전, 정관헌, 준명당, 양심당, 구여당, 석조전 등의 일부 건물만이 여기 저기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전각(殿閣), 문루(門樓) 등이 헐린 사이 사이에는 화단(花壇)과 초장(草場)을 만들고 잔디와 작약(芍藥), 모란 등을 심어 새로운 경관(景觀)을 이루며 이 동안 1913년 봄에는 경성일보 사장 요시노가 벚나무 500그루를 진상하여 심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3년부터는 궁내를 일반에게 공개 관람하게 하니, 이제는 시민들의 소풍 산책하는 고궁으로 변화하였다.

또 종래 황실의 귀빈 접대시 사용되던 석조전은 일제 미술품의 진열 전시장으로 바뀌어지며, 1936년 3월에는 다시 석조전 서쪽으로 미술관 신축공사를 착수하여 1938년 8월에는 연건평 1,000여평의 미술관을 건립하고 창경궁박물관 소장의 미술품, 고고학자료 등을 옮겨 수장 전시하여 일반의 인기를 모으기도 하였다. 또 일반 공개가 시작됨과 함께 여기 저기에 매점, 휴게실 등이 생기니 고궁의 인상은 차츰 희미하여지게 되었다. 또 1921년에는 창덕궁 화원에 새 선원전(璿源殿)이 이루어짐과 함께 중화전에 봉안(奉安)되었던 고종의 어진(御眞)도 옮겨가니 덕수궁과 고종과의 깊은 관계도 옛날 일이 되고 말았다.

대한제국기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 일대 모습

일본이 강압적으로 조선과 먼저 수호조약을 체결하자 구미제국들도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문호가 대외적으로 개방되었고, 그리하여 서울의 정동을 비롯한 주요한 곳에 서구공사관이 자리를 잡았고 앞다투어 양옥 건물이 세워지게 되었다.
미국공사관은 덕수궁 후문 쪽에 자리 잡고 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후 1884년 최초의 주한공사 루시우스 H 푸트장군이 부임해오자 당시 정5품 한림 민계호(閔啓鎬)의 저택을 미화 2천달러(한화 1만냥)에 구입하여 공사관 겸 저택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러시아공사관은 현 정동교회 건너편(정동 15-1번지, 1977년 사적253호 지정)에 1890년(고종27) 건축되어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1986년2월1일부터 다음해 2월20일까지) 머물렀다.

영국공사관은 덕수궁 북쪽 현재의 위치(정동 4번지)에 1890년 세워졌다.
프랑스공사관은 1886년6월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고 그 이듬해 박동 독일공관 서편에 인접한 한옥을 사용하였으나(수표교 북방도로 현 관수동 126번지) 협소한 것을 이유로 1888년 11월 러시아공관과 정동교회가 인접한 지역(현 창덕여중 자리)에 새로 공관기지를 선정 구매하여 1889년 10월 이사하였으나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공사를 철수하였다.
1901년(광무5)에는 각 외국 공관에 정동 황궁(皇宮) 근처에 고층건물을 짓지 말도록 통보하기도 하였다.

구미열강의 공사관 뿐만 아니라 구미인들이 세운 양옥 건물들도 줄을 이어 세워졌다.
덕수궁 서남쪽에 있는 정동교회(정동32-2번지)는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가 조선에 입국하여 감리교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1885년 7월 한국인 가옥을 구입하여 예배처로 삼은 것에서 비롯되어 1895년 한옥을 개조하여 새 교회당 건물을 세웠다. 1890년 조선에 전파되어 온 성공회성당(정동 3번지)은 1914년 서울 도시 계획에 의해 현재의 태평로 일대가 확장되면서 영국인 건축가에 의해 설계되어 1926년 5월 완공되었다.

외국인 상대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이 1900년 정동(정동 32번지)에 세워졌다. 이 호텔은 1885년에 초대 러시아공사(露國公使) 웨베르(Waber)와 함께 내한(來韓)한 손탁 양이 1895년에 고종으로부터 정동에 있는 한 가옥을 하사 받아 외인(外人)의 집회소로 사용하다가, 1902년 10월에 이 구식 가옥을 헐어서 2층 양관을 신축하였다. 2층은 귀빈실, 하층은 보통실과 식당을 두었다고 한다. 이 호텔 건물은 1918년에 이화학교에서 매수하여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그것을 헐고 1923년 프라이 홀을 지었다.

일제시대의 덕수궁을 둘러싼 정동일대 모습

일제강점 이후에는 궁의 서쪽 선원전의 터를 일부 통과하는 도로가 열렸다. 지금의 미대사관저와의 사잇길이 그것이다. 선원전을 헐고 그로부터 북쪽으로 전일의 경기여고 교사를 지었다. 이듬해 1923년에는 그 맞은편 제사 준비소 터에 지금의 덕수초등학교의 교사를 지었고, 1927년에는 그 동쪽 언덕 위를 밀어내고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의 청사를 지었다.

이화학당(梨花學堂)은 중학과(中學科)와 대학과(大學科)의 창설로 학교 체제가 완비되어갈 무렵 학생수가 증가하여 기왕에 있던 메인홀(Main Hall)만으로는 학생을 완전히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학당장 프라이(Lulu E. Frey)는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하여 정동 30번지를 구입하였는데, 이 터는 1896년에 설치되었다가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폐쇄된 원호국 시종원(侍從院)이 있던 곳이다.
프라이는 미쓰 홀부룩(Miss Holbrook)이 희사한 기금으로 1914년 착공하여 1915년 3월 준공하였다.
원래 홀부룩의 기금은 그의 동생인 사라 심슨(Sarah J. Simpson)이 세상을 떠날 때 위탁한 것이기 때문에 이 건물을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이라 하였다.
또한 학당장 월터는 독자적인 유치원 건물의 필요성을 느껴 미국의 에드가 후퍼 부인(Mrs. Edgar Hooper)으로부터 기부금 1만원을 받아 이명원(李命遠)으로 하여금 유치원 건물을 짓게 하였다.

1921년 5월 우선 60평의 교사를 건립하고 동년 10월에 40평의 교사를 동년에 증축하여 총 건평 100평의 유치원 전용건물(에드가 후퍼기념관 : Ralph Edgar Hooper Memorial Kindergarten Building)이 완성되었다 한다.
프라이홀(Frey Hall)은 정동 29번지에 184평의 손탁호텔을 구입하여 이 자리에 새 건물을 건축한 것으로, 1922년 8월 제5대 학당장 월터가 착공하여 1923년 9월 제6대 학당장 아펜젤러 때 완공되어 프라이홀이라 하였다. 이 건물은 1935년 전문학교가 신촌으로 옮긴 뒤 이화여고에서 사용하다가 1975년 화재로 2 · 3층 474평이 소실하였다.

조선말에 호조 대신 조세, 국채, 화폐 등 재무 행정을 관장한 관아인 탁지부는 대한제국이 수립되고 나서 세종로에서 덕수궁 옆 중구 정동으로 이전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호조를 폐지하고 탁지아문(度支衙門)을 설치했는데 1895년에 탁지부로 개칭한 것이다. 탁지부가 이전되어 사용한 건물은 고종이 양위(讓位)하기 전에 의정부 청사로 설계한 것으로 1907년 12월에 준공되었지만 한일신협약이 체결된 이후였으므로 탁지부 청사로 변경했다. 이 건물은 일제 침략기에 고등법원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1970년에 헐렸다.
현재 서울특별시 별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서울고등법원 청사는 중구 서소문동 37번지에 위치해 있다. 본래 재판소는 대한제국 시대부터 공평동에 있었으나 1927년 6월 정동 언덕의 원래 총독부 분실이 있던 자리에 경성재판소로서 새 청사의 신축을 시작하여 1928년 8월에 준공되기도 하였다.

광복이후 현재의 덕수궁

광복을 맞으면서, 덕수궁 내의 석조전이 새로운 역사 문화의 장으로 활용되었다. 그 해 10월 해방 기념 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으며, 그 이듬해 1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임시 회의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또한 1948년부터 1950년 6.25가 발발할 때까지 UN한국위원단에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54년 6월에는 석조전을 국립박물관으로 처음 사용하였으며, 1955년에는 석조전 건물의 일부를 육군 공병단에서 수리 복원하였다.
1961년 10월 정식관리기구인 덕수궁 관리사무소가 설치되어 관리를 전담하게 되었다. 그 해 11월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에 의한 제 1차 도로확장공사로 시청 쪽 담장이 철거되고 철책으로 대체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7월 덕수궁을 사적 제 124호로 지정하였다. 다시 1968년 5월에는 서울시 도로확장공사로 시청 쪽 도로에 편입되어 설치된 철책을 철거하고 담장을 설치하였다.

또한 그 해 7월에는 남대문경찰서 태평로파출소가 덕수궁 동북담 모서리에 신축되었으며, 이 공사로 덕수궁 대지 25평이 편입되었다. 7월 15일에는 담장 이전공사로 담장 만을 궁 내부로 이전하고 대한문(大漢門)은 원위치 도로상에 폐쇄 고립됨. 당초 당 궁 총면적 20,114평 중 1,977평이 도시계획 등에 의해 편입되어 18,137평이 보존관리 면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덕수궁에서 관리하여오던 미술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이관하였다.(대통령령 제3525호) 1970년 8월에는 도로상에 폐쇄 고립된 대한문(大漢門) 이설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월 2일 이설 준공되었다. 1973년부터 86년까지 석조전 서관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으며, 98년 8월 석조전 서관이 다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개관하였다.

1992년 12월 덕수궁 관리사무소의 직제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궁중유물전시관은 덕수궁 관리는 물론 5대궁궐 13개 능원에 분산 소장되어있던 궁중유물을 한군데 집중 관리하게 되었으며, 석조전에 일반인들을 위한 전시관도 개관하게 되었다.

2005년 8월15일 궁중유물전시관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하였고, 덕수궁의 관리는 다시 덕수궁관리소에서 하고 있다.